서안동농업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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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산서원 전체 건물의 전경을 하늘에서 촬영
    • 문화재: 경사적 제 260호(1978년3월31일)
    • 주소 :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길 386(구. 병산리31)
    • 거리 : 28km
    • 버스타기 : 교보생명 건너편 46번
    • 병산서원 버스 타기
      안동출발 행선지출발
      07:50 11:00 14:20 09:10 12:10 15:40
    병산서원의 위치를 안내하고 있는 지도. 중앙고속도로에서는 서안동 IC를 통해 병산서원으로 올 수 있다.
    • 소요시간 : 버스(60분) 택시(45분)
    • 문의전화 : 하회마을관리소054)854-3669 ,하회탈박물관 054)853-2288
    • 관람료 : 없음
소개

안동에서 약 30분 하회방면으로 가다 하회입구에서 병산서원으로 들어간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적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절제와 간결,단순과 체계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유교건축의 백미이다. 병산서원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고려말부터 사림의 학문의 전당이었다. 1613년(광해군 5년) 우복 정경세 선생 등 유림의 공의로 서애 류성룡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존덕사를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했다.
1629년 선생의 셋째아들인 수암 류진공을 배향했으며, 1863년(철종14년) "병산"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68년(고종 5년) 대원군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 제외된 전국47개 서원 중의 한 곳이다. 3월과 9월 초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산과 강이 어우러져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이곳에는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전시관
  • 1613년(광해군 5)에 정경세 선생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서애 류성룡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덕사를 창건하여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후 1629년 선생의 셋째 아들 수 암 진 공을 배향한 서원이다. 이 서원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고려말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으나 1572년(선조 5)에 류성룡 선생이 이 곳으로 옮긴후 1863년(철종 14)에 '병산' 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의 서원중의 하나가 되었다. 경내 의 건물로는 존덕사, 입교당, 신문, 전사청, 장판각, 동재, 서재, 만대루, 복례문, 고직사등이 있다.
    묘우인 존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양식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단청이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기단 앞의 양측에는 8각 석주 위에 반원구의 돌을 얹어 놓은 대석이 있는데 이는 자정에 제사를 지낼 때 관솔불을 켜놓는 자리라 한다.

    존덕사에는 주향인 류성룡 선생과 배향인 류진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강당인 입교당은 정 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가구는 5량이며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하는 곳이다. 신문은 향사시 제관의 출입문으로 사용되며, 전사청은 향사시 제물을 장만하여 두는 곳이다. 장판각은 민도리집 계통으로 되어 있으며 책판과 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정면 4 칸, 측 면 1칸 반의 민도리집으로 된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곳으로 사용된다.

  • 문루인 만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식 건물로써 서원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도록 건축되었으며, 향사때에는 고지기가 개좌 또는 파좌를 아뢰는 장소로 사용 되기도 한다.

    그밖에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는 물길을 끌어 만든 천원지방 형태의 못이 조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흙으로 메꾸어 없어졌다. 이 서원은 현재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류성룡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종 3,000여책이 소장되어 있다.

    이 서원의 주향인 류성룡(1542~1607)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자는 이현이고 호는 서애 이며 풍산인이다. 조의 휘는 공작으로 의정부찬성에 증직되었으며, 고의 휘는 중영으로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선생의 비는 정경부인 안동김씨로 진사 광수의 딸이다. 선생은 일찍부터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들어가 근사록의 전수를 받았으며, 1564년(명종 19) 생 원, 진사가 되고, 1565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년 (선조 1) 대교, 1569년에 전적, 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 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 지제교로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 뒤 정언, 병조좌랑, 이조좌랑, 부교리, 이조정랑, 교리, 전한, 장령, 부응 교, 검상, 사인, 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1579년에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에 는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간, 우부승지, 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으로 승진하여 왕명을 받고 <황화집> 서문을 지어 올렸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을 지어 올렸으며, 그 해 함경도 관찰사에 특제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어 대사성에 임명 되었으나 역시 사 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 관사, 제학을 겸하였으며, 다음해에 왕명으로 <정충록발>을 지었고, 또 다음해에 <포은집>을 교정하였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1589년에 대사헌, 병조판서, 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을 지어 바쳤다. 이 해에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게 되자 여러차례 벼슬을 사직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를 올려 자핵하였다.

  • 1590년 우의정으로 승진, 광국공신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이 해에 정여립 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하였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1591년에는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여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으 며, 이 해에 건저문제로 서인 정철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 중의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의 이산해와 대립하였다.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형조정랑 권율과 정읍현감 이순신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으며, 경상 우병사 조대곤을 이일로 교체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년 3월에 일본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를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 사신은 그대로 돌아갔다 그해 4월에 판윤 신립과 군사에 관하여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 4월 14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 뒤 충청, 경상, 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 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으며, 이여송이 벽제관에서 대패하여 서로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권율과 이빈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하고 제장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 해 4월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하자 그에게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 또 군대 양성과 함께 절강기계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의 수축을 건의하여 군비 확충에 노력하였으며,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10월에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변응성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에 주둔하게 함으로써 반적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가 되어 <기효신서>를 강해하였다. 또, 호서의 사사위전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할 것과 조령에 관둔전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 보완을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 직을 삭탈당하였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하여졌다. 도학, 문장, 덕행, 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애집, 징비록, 신종록, 영모록, 관화록, 운암잡기, 난후잡록, 상례고증, 무오당보, 침경요의 등이 있고, 편서로는 대학연의초, 황화집, 구경연의, 문산집, 정충록, 포은집, 퇴계집, 효경대의, 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 그런데 그의 저서에 대하여 문인 정경세가 <서애행장>에서 "평생 지은 시문이 임진병화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 권과 신종록, 영모록, 징비록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시호는 문충이다. 병산서원에 배향된 류진(1582~1635)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계화요, 호는 수암이다. 임진왜란 뒤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0년(광해군 2)에 사마시 에 합격하였으나, 1612년 해서 지방에서 김직재의 무옥이 일어났을 때에 무고를 당하여 5개 월간 옥고를 치렀다. 1616년에 유일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뒤 다시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화현감이 되었다. 수령으로 있으면서 전묘와 부세를 바로 잡았다. 이듬해 형조정랑이 되었는데,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원옥을 해결하여 판서 이서의 경탄을 샀다. 1627년에 청도군수가 되었다가, 1628년에 수포장인에 대한 보고에 허위가 있다하여 파직당하였다. 1634년 지평으로 있을 때 장령 강학년이 다시 서인정권의 정책을 크게 비판하여 심한 논란이 일어났는데, 이때 그를 두둔하여 대간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고관대작을 역임하지는 않았지만 세신의 후예답게 깨끗하고 성실하게 생애를 보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수암집 >이 전한다
병산탈

하회탈과 함께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다.
병산탈은 하회탈과는 작풍이 전혀 다르며 병산마을에서 전래되어 왔다.
양반과 선비 두점의 탈이 있는데 두점 모두 턱이 없으며 그 이유는 탈꾼의 턱이 탈의 턱 역활을 대신하면서 자유로운 재담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병산서원의 전신 풍악서당豊岳書堂)

고려조에 풍산현의 큰길가에 풍악서당이 있어 사림(士林)의 자제들이수학하였는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몽진 오다가 난리중인데도 서생(書生)들이 학업에 열중하고 있음을 보고 이를 가상하게 여겨 서책을 하사하고 땅을 사패지(賜牌地)로 내려 격려하였다. 이것이 병산서원을 일으키는 토대가 된 셈이다. 서당이 인가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우마의 왕래가 잦고 소란스러우므로 독서에 지장이 있다고 하여 한적 하고 풍광 좋은 곳으로 옮길 것을 고려하다가, 지금의 병산서원 자리에 (선조 5년1572)에 서애(西厓)가30 세 되던 해 지금의 자리로 옳기고 .임진왜란에 소실된것을,서애 사후 8년 만에 유림에서 이 서당을 기반으로 지금과 같은 규모의 서원을 건립하고, 1613년(광해군5)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l633) 선생 등 사림들의 공의로 서애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문충공 서애의 위패를 봉안해두었다. 향사는 음력 4월과 10월의 첫 정일이며., 1629년 선생 셋째 아들 수암(修巖))류진(柳袗)( 1582-1635)공을 배향했다

서원철폐령을 면하고

이 서원은 1863년(철종14) '병산'이란 사액(賜額)을 받았기 때문에 대원군 서원 철폐령이 내려졌을때 안동지방에 남은 2개소 가운데 한 곳이 되었다. 철폐령 하에서 전국에서 제외된 47개 서원에 병산서원이 포함된 것은 도산서원의 경우는 이미 ,선조8년(1575)에 사액을 받아 대원군이 집정한 1864년(고종1) 당시 이미 300여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나, 병산서원의 경우는 철종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863년(철종14)에 사액을 내리라 는 윤허만 있었을뿐 시행은 되지 못한채 국왕이 이해 12월 세상을 떠난 것이다. 사액이 완료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철폐될 수도 있었다. 이때 서애 선생의 8대손이며 수암의 7대 주손인 낙파 류후조의 활약이 컸다.물론 흥선대원군이. 서애 선생을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했다는 점도 고려될 수 있겠으나 그보다는 좌의정 직에 있다가 결연히 사퇴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논리 정연하게 병산서원 훼철 불가론을 들고나온 노대신(老大臣)의 청을 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제외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난 1995년에 뒤늦게 간행된 「낙파집(落坡集)」에 실린 한 편지에는 당시의 역할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풍산중(豊山中),종고(綜高)의 설립

해방 후에는 서원 본래의 교육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옛 모습 의 서원 형태로는 곤란하다는 데 뜻을 모으고 신교육기관으로 학교 를 설립하게 되었다. 공민왕으로부터 받은 사패지와 기타 서원 소유의 전답과 임야 등 서원의 전 재산을 기금으로 하여 학교법인 '병산교육재단'을 만들고 풍산읍 안교동에 병산중학교를 설립하였고, 다시 고등학교를 병설하여 풍산종합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그러므로 지금의 풍산중학교와 풍산종고의 역사적 뿌리는 고려때의 풍악서당에까지 거슬러 을라가며, 그 뜻은 학문을 숭상한 서애의 호학정신(好學精神)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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